아버지를 추억하며

개인적인것/소중한사람들 2015. 12. 10. 15:08 Posted by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서윤이가 지금 내 나이가 되면, 나는 꼭 우리 아버지 나이와 비슷하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금 3살인 서윤이 지금 37살인 나.

이 차이만큼의 간격이 서윤이가 커가면 커갈수록 많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이 차이의 간극은 어쩌면 부모자식간이라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는 내가 항상 깨어있어야 하겠구나라는 생각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어쩌면 이런 나의 생각들을 한 번쯤 해보지 않으셨을까하는 생각

 

 

 

아버지는 지금 안계시지만

참 많은 걸 남기고 가신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37년간의 시간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이 숨쉬고 살아온 37년간의 시간들.

 

시간의 흐름에 좋은추억 나쁜추억 할 것 없이 기억이 흐릿하게 되기전에

틈틈히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들을 한조각씩 적어놓고 싶다.

 

 

 

유치원시절 학교에 가기전 나는 오락실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오락실에서 마주치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아버지.

그땐 오락실이란게 참 못 된 곳이라서 아버지에게 걸리면

죽도록 맞았던거 같다. 그렇게 아버지께 맞으면서도 계속 같더랜다.

오락실에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있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무서워서 집에 못들어간 기억도 나고.... 오락실때문에 발가벗겨져

집에서 쫒겨난 기억도 난다.

 

부곡3동

내가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고물상을 하셨다.

고물들이 쌓여 있는 넓은 마당 그리고 내가 살던 집은 버스를

개조해서 사용한 걸로 기억된다. 아랫목이 있어서 어떤곳은

너무 뜨겁고 장판이 타서 항상 시커멓게 변해 있었던거 같다.

밤이면 지붕에서 생쥐들이 돌아다녀서 천장을 툭툭 쳤던 기억도 있다.

여름이면 마당에 고무다라이에 물놀이를 했던 기억이 나고

어머니가 감자를 삶아주면 그릇에 담아 설탕을 뿌리고 파지위에

올라가 숫가락으로 감자를 으깨 먹었다.

고물상 마당에는 오리도 키웠고, 고물로 들어온 철재 캐비넷에

닭들도 키웠다. 아침마다 따끈따근한 계란을 가지고 왔었고

학교앞에서 파는 힘없는 병아리를 데리고 와 키운 기억도 나고

아버지와 함께 햇살좋은날 고물상 마당에 모이를 뿌려놓고

추망을 이용해서 참새를 잡았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가 고물상을 하시며 타고다니셨던 타이탄 2.5톤 핸드기어 트럭이

고물상에 들어오면 차에 싣고 오거나 고물상에 있던 젖갈, 폐인트를등을

담는 작은 사각 철통을 차 뒷바퀴에 나란히 놓는 역할을 했다.

그걸 바퀴뒤에 나란히 놓으면 아버지가 후진하여 바퀴로 납작하게

찌그러뜨려 부피를 줄였다.

 

지금은 카톨릭 대학이 생겨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부곡동 우리집 뒷산에는 구월산이라는 산이 있었고 지금 카톨릭 대학이

있는 그 자리엔 폭포가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면 고물상에서 일하시는분

들과 장어, 삼계탕등을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러가던 자주갔던 곳이고, 가재를 잡는다고

참으로 많이 다녔던 구월산이다. 그 산 꼭대기에는 아주 큰 그네가 있었는데

몇년전 아내와 오리엔티어링을 하러 갔다가 들렀는데 그대로 있었다.

 

부곡동에는 해동수원지가 있다.

수원보호구역이라 고기잡이가 금지된 곳인데 아버지와 자주 고기를 잡으로

간 기억이 난다. 한번은 추망을 쳤는데 가물치가 걸렸다. 아버지가 밟으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이유를 알려주셨는데

가물치는 짝지끼리 다니는데 똑똑해서 추망에 걸리면 둘이 힘을 합쳐

추망을 들고 도망가기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란다. 그 날 한마리는 도망가고

큰직한 놈 한마리는 잡아온 것 같다. 

한번은 해동수원지에서 단속원에게 적발된적이 있다. 단속원이 추망을 

압수하려하자. 추망에 달린 무게추 이런 고물로 쓴다면서 단속원 앞에서

추망을 쫘~악 찢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추망의 가격이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단속되어서 참 많이 압수당하셨던거 같다.  

그땐 향어등 민물고기도 곧잘 먹어서 외삼촌과 같이 고기잡으러도 많이 갔고

회로 먹을때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막걸리에 잠시 담궜다가 먹는 걸 본거 같다.

동네친구들 누나들과도 해동수원지는 참 많이 걸어서 많이 다녔다.

언제인가는 누가 키우고 있었던거 같은데 얕은 물에 향어가 있어 한마리

건져온거 같다.

해동수원지 지금은 작은 계곡들이 별로 안보이는것 같은데 그땐 작은 계곡물도

있어서 다슬기도 많이 잡았다. 우리집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는 다슬기로

된장 같은걸 만들어 드시기도 했다.

 

아버지께선 저녁이면 술을 많이 드시곤 했고, 술을 드시고 오시면

집안이 항상 시끄러웠다. 술한잔 하시면 늘 나에게 양말을 벗겨 달라고 했는데

얼마전 서윤이가 내가 양말을 벗는걸 자주 봐서 그런지 퇴근한 나에게 슬며시

와서 내 양말을 벗겨주더라. 이 느낌을 머라고 해야하나...흐뭇한 느낌...

내가 아버지 양말을 벗겨드릴때 아버지께서도 나의 그런 느낌이셨을까....

아마 그랬을거라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